(모나코 다녀온 이야기보따리를 풀기전에
세기의 결혼식이었던
그레이스 켈리와 모나코 왕 '레이니에' 3세의 결혼식부터 보고가자)
1956년 4월, 헐리우드 최고의 여배우 '그레이스 켈리'와
모나코 왕 '레이니에' 3세의 결혼식
그레이스 켈리...
결혼식의 규모만 보아도 얼마나 성대한가를 알수있다
모나코 대성당에서 레이니에 3세와 그레이스 켈리
아름다운 신랑신부..
한나라의 왕과 결혼한다는것..
참으로 로멘틱한일이다.
물론 그 뒤에는 생각지 못할 많은 시련이 존재할것이다.

그레이스 켈리가
레이니에와 결혼하기전 모나코에서의 모습
그들의 첫만남은 화보촬영온 켈리를 본 레이니에공이 반했고
수많은 러브레타가 오고가면서 마침내 결혼식을 올렸다
결혼식장으로 입장하는 레이니에 3세와 그레이스 켈리

1956년 4월 12일
그녀의 나이 28살 이었다
결혼식을 위해 모나코로 들어 오는 모습
앞에 그레이스 켈리가 흰모자를 쓰고 걷고있고
뒤에 레이니 3세가 오고있다

레이니에 3세와 그레이스 켈리의 모습
세기의 결혼
1956년 4월 모나코에서 세기의 결혼식이 거행되었다
그레이스 켈리와 부모는 여객선을 타고 모나코로 향했다
일행 모두는 이미 오래 전부터 축제 분위기였다.
전야제에 뒤이어 결혼식은 18일과 19일 이틀동안 두 차례에 걸쳐 거행되었다.
법률상의 결혼식과 종교상의 결혼식이었다.
르네상스식의 웨딩드레스를 입은 그레이스와
나폴레옹 시대를 연상시키는 훈장을 단 레이니에공의 결혼은
바로 영화속의 한 장면을 방불케했다
밤하늘을 수놓은 불꽃을 감상하며 사람들은 밤새 춤을 추었다.
모두들 두 사람의 결혼 생활을 축복하고 있었다.
세기의 결혼으로 불린
그레이스 켈리와 레이니에공의 결혼식을 보기 위해
세계각국에서 수많은 하객들이 몰려들었다
호텔마다 만원이었고 거리는 사람들로 붐볐다
두 사람의 결혼식을 취재하기 위해
각국에서는 2,000명이나 되는 기자들이 열띤 취재 경쟁을 벌이기도 했다.
같은 왕족이 있는 영국은 보다 특별한 관심을 보였다.
"우리 영국은 발레단을 보내겠소"
"우리 프랑스도 발레단을 보내겠읍니다"
만약에 그레이스 켈리가 왕자를 낳지 못하면 모나코는 프랑스에 합병당하는 위기에 처해 있었다.
그래서 프랑스 또한 그레이스 켈리에게 지대한 관심이 있었다.
유럽은 온통 축제의 분위기였으며
온 세계에서 사절단을 보내 이 결혼식을 축복해 주었다
군함에 탄 수병들이 모나코를 방문하여 결혼식을 축하 하기도 하였고
모나코 국민은 물론 수많은 관광객들이 한집안 식구처럼 즐거워하며 가장 아름답고 화려한
세기의 결혼식을 축복해 주었다
19일 저녁,
세상에서 가장 큰 축복을 받으며 탄생한 이 부부는 레이니에의 요트'데오쥬반테'를 타고
스폐인으로 신혼여행을 갔다.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킨 이 결혼식 소동은 일주일씩이나 계속되었다
모나코 로서는 그레이스 켈리를 신부로 맞이함으로써
현실적으로 몇 갑절의 관광 수입을 올릴수있다는 계산을 하지 않을수 없었다
뜨거운 태양과 지중해의 에메랄드빛으로 둘러싸인 꿈같은 작은나라,
카지노의 수입으로 사는 2만 5,000의 국민들은 나라에 세금을 낼 필요조차 없이 부유하게 살았다.
게다가 그레이스가 모나코로 시집을 감에 따라 삽시간에 미국인들의 모나코 여행이 급증했다.
이 때문에 모나코는 관광 수입이 부쩍 늘어 국민들은 이래저래 그녀를 사랑하게 되었다.
그레이스 켈리는 황태자의 아내가 된 후, 일절 영화에 출현하지않았다
그녀의 팬들로서는 이만저만 손해가 아니였지만 배우로서 가장 인기절정에 있을때
과감하게 배우의 일생을 정리한 것이었다.
"성공이나 명성도 서로 나눠 가질 상대가 없으면 허무할 뿐이다"
그레이스는 더 이상 영화에 미련을 갖지 않았다.
작은 나라의 왕비로서 책임과 역할을 다하며
모나코를 이을 왕자를 낳는 일에 더 많은 신경을 썼다
이윽고 그레이스 켈리는 차례차례 세 아이를 낳아 모나코를 프랑스에 합병당할 위기에서 구해 주었다
그레이스에게 왕궁 생활이 그리 쉬운건 아니었다.
엄격한 규칙이나 전통을 제대로 지켜야 하고,
언제나 긴장하며 위엄을 갖춘 모습을 보여야만 했다
크게 웃을수도, 누구와 잡담을 할수도 없는 생활이었다.
게다가 살아온 방식과 가치관이 다른 레이니에와의 생활은 자유롭게 살아온 그녀에게 있어서 다소 힘들기도했다.
그러나 그녀는 탄탄하게 다져진 연기훈련 덕택에 무난하게 왕궁 생활에 적응을 했고
쉽게 왕궁의 법도를 익힐수 있었다.
"내가 배우생활에서 익힌 시간을 엄수하는일, 같은 일을 몇 차례고 되풀이 하는일, 화장하는 방법,
걸음걸이, 남과 접촉하는 방법등은 다시 배울 필요가 없었다."
배우 그레이스 켈리는 한 나라의 왕비로서 만족을 하며 아무탈 없이 지냈다.
이름없는 꽃에 묻혀 잠들고....
1957년 1월에 공주 캐롤라인을, 이듬해 알베르토 왕자를, 65년에 스테파니 공주를 낳고
그녀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행복한 어머니가 되었다
그녀는 매일 분주하게 살았다.
왕비이면서 한 사람의 아내이고, 또 어머니 이면서 300개가 넘는 방이있는
궁정의 여주인이기도 했던 그녀로서는 바쁘지 않을수 없었다
하루 서너차례 옷을 바꿔입을 정도로 바쁜 나날이 계속되었다,
낮에 입는 옷,만찬을 위한 드레스, 발레나 오폐라를 관람랄때 입는 옷...
모나코 왕궁에서 그레이스 켈리의 이야기가 나오면 세계는 귀를 번쩍 뜨고 소식을 전하느라 바빳다.
장녀 캐롤라인이 자라 열여덟살이 되었을때
호텔왕의 아들 테니스 보그와 장 폴 벨몽드 등을 상대로 염문을 뿌리기 시작했다.
끝내 캐롤라인은 부모의 반대를 물리치고
19년이나 연상인 플레이보이와 결혼을 했다가 곧 이혼을 하고 말았다.
세계의 언론은 캐롤라인의 염문을 대대적으로 보도하며 흥미거리로 삼았다,
언제부터인가 모나코 왕궁은 스캔들의 원산지로 지목되어 있었다
그러기에 그레이스 켈리는 더욱 자녀교육에 신경을 썼지만,
자식만큼은 자기 뜻대로 되지 않았다.
훗날 모나코를 이끌고 나갈 알베르도 왕자도 심심찮게 스캔들을 뿌리고 다녔고,
차녀인 스테파니도 담배를 피우며 디스코에 열중하였다.
그레이스로서는 세상의 평범한 부모들보다 몇배 더 머리아픈 세월을 보내야만 했다.
자녀들의 염문은 늘 세계적인 특종감이었다.
그러나 가장 특종은 그녀의 최후에 찾아왔다.
그레이스 켈리의 사고 소식이 모나코 왕궁에서 흘러나왔을때 세상은 온통 슬픔에 잠겼다.
"1982년 9월 13일 별장에서 스테파니공주와 함께 왕궁으로 돌아오던 왕비께서는
산길에서 급커브를 돌다가 40미터 절벽 아래로 추락하여 불길에 휩싸이고 말았읍니다.
두 사람은 곧 몬테카를로 병원으로 운반되었으나 상태가 매우 위급한 것으로 알려졌읍니다.
"그레이스 켈리의 사고 소식이 전세계로 빠르게 전해졌다.
모나코에서 가장 인기있고 사랑받는 그녀가 다시 살아나기를 기도하며 국민들은 모두 침울했다.
그러나 그레이스는 이�날인 14일 오후 10시30분에 머나먼 나라로 떠났다.
26년간의 가장 행복한 결혼 생활과 53년 동안 불꽃처럼 타올랐던 생을 마감한 것이다.
죽기전에 그레이스의 입술이 가볍게 움직였다
"난 작은, 이름없는 꽃에 묻혀 잠들고 싶어......."
죽음이 찾아와 눈을 감으면서도 생전의 아름다움은 조금도 변함리 없었다.
미의 대명사로 불리던 그녀가 남긴 주옥 같은 영화와 생전의 아름다움은 영원히
사람들의 가슴에 남아 오래도록 잊여지지 않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