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 둘은 운동보내놓고
전학생 앞세워
조선왕조 500년
역사 속으로 사라져간
선대 왕릉 가이드로 나섰다
▶동구릉◀
우선
문화해설사의 도움말 부터 듣고 ..
주소 : 경기도 구리시 동구릉길 217-14
☎ 031) 563-2909, 564-2909
주차료 : 2,000
관람료 : 대인 1,000 소인 500
하여간
저 학생은
궁금한것도 많아요..
단 한곳도 그냥 지나치지 않는다
동구릉은
* 건원릉 : 조선 제 1대 태조의 능
* 현릉 : 조선 제 5대 문종과 현덕왕후의 능
* 목릉 : 조선 제 14대 선조와 원비 의인왕후, 계비 인목왕후 능
* 휘릉 : 조선 제 16대 인조의 계비 장렬왕후의 능
* 승릉 : 조선 제 18대 현종과 명성왕후의 능
* 혜릉 : 조선 제 20대 경종의 원비 단의왕후의 능
* 원릉 : 조선 제 21대 영조와 계비 정순왕후의 능
* 경릉 : 조선 제 24대 현종과 원비 효현왕후, 계비 효정왕후의 능
* 수릉 : 추존 문조와 신정왕후의 능
↑조선 제 1대 태조의 건원능
↗우측 언덕배기 출입금지였던
"목릉" 을 살펴봤다
조선 14대 선조와, 원비 의인왕후, 계비 인목왕후의 능
가파르지 않아 쉬이 오를수 있기에..
↓선조 임금님 능 좌측 뒷편에 자리한
평풍막 없는 의인왕후 능
두 아줌마 공손히 참배를 드렸다
두분의 능 아래쪽 좌현에
계비 인목왕후 능이 보인다
3시간 걸쳐
동구릉을 두루 돌아보고
남양주로 핸들을 돌려 또 다른 능을 찾았다
▶홍유릉◀
홍릉
조선 26대 고종(高宗)
유릉(裕陵)
[다음백과사전 참조]
일제의 강요로 한일신협약·기유각서·한일합병조약 등을 체결했다.
이름은 척(拓). 자는 군방(君邦), 호는 정헌(正軒).
1882년 뒤에 순명효황후(純明孝皇后)가 된 민씨를 세자빈으로 맞았고,
1904년에는 윤씨를 황태자비로 새로 맞이했다.1907년 고종이 일제의 강요에 의해 왕위에서 물러나자 대한제국의 황제로 즉위하여 연호를 융희(隆熙)로 고쳤다.
동생인 영친왕(英親王)을 황태자로 책립했다.즉위 후 일본의 강요로 한일신협약을 체결함으로써 일본인 차관이 국정 전반을 간섭하는 차관정치가 시작되었다.
이어 일제는 재정부족의 이유를 들어 군대를 강제 해산했으며,1909년에는 기유각서를 통해 사법권마저 빼앗았다.
정치·외교·군사·경제·사법권 등을 강탈한 일제는 조선을 완전한 식민지로 만들기 위해
이용구·송병준 등이 중심이 된 일진회를 앞세워 합병을 추진하여
1910년 한일합병조약을 체결함으로써 대한제국은 무너지게 되었다.대한제국 붕괴 후 순종은 왕으로 강등되어 창덕궁에서 거처하다 1926년 죽었다.
순종의 장례 때 6·10만세운동이 일어났다. 능은 유릉(裕陵)이다
이정표를 보니
멀지않은 곳에 "사릉"이 표시되어 있었지만
사릉은
단종비 정순왕후의 능이며
사능의 소나무 가지가 님계신 영월을 향해 휘어져 있다는 사능
시간상
다음으로 미루고 돌아올수밖에 없었다
[다음 검색으로 찾아본 사릉]
사릉(思陵)은
사적 제209호로 경기도 남양주시 진건읍 사릉리 산 65-1에 위치하고 있다.
정순왕후 송씨는 1440년 여량부원군 송현수의 딸로 태어났다.
1454년 음력 1월 22일에 열 다섯의 나이로 한살 연하였던 단종과 혼인하여 왕비에 책봉되었다.
1455년, 단종이 수양대군(세조)에게 왕위를 일임하고 상왕이 되자 왕대비가 되어 의덕(懿德)의 존호를 받았다.
그러나 1457년, 성삼문, 박팽년 등 사육신이 추진하던 단종 복위 운동이 발각되자
상왕 단종은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봉되어 영월로 유배되었고,
의덕왕대비는 군부인이 되어 궁에서 쫓겨났다.[1]
1457년 단종이 세상을 떠난 지 64년 후인 중종 16년 1521년 음력 6월 4일
왕후가 82세의 일기로 승하하고,
177년이 지난 숙종 24년(1698) 11월 종묘에 신위가 모셔졌고 능호를 사릉이라 하였다.